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ADHD가 있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정식으로 진단을 받은 건 아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주의가 산만하다", "한 가지에 집중을 못 한다"는 말을 지겹게 들으며 자랐다. 그런데 청소년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집중하면 몇 시간이고 앉은자리에서 책을 보는 집중력을 가지게 되었고, 내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게 되었다. 그땐 그게 산만함을 "이겨낸"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ADHD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그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목회자가 된 지금 내 모습을 돌아보아도 영락없는 ADHD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조용하면 불안하다. 일하다 한 번 끊기면 다시 돌아오는 게 너무 힘들다. 그러다 한 번 집중에 들어가면 몇 시간이고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그 흐름이 끝나고 나면 녹초가 된다.
목회 현장은 설교를 준비하고, 사람을 만나고, 행정을 처리하는 일의 전환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문제는 그 환경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그래서 때때로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나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쳐, 숨어서 일하기도 했다. 나는 나를 스스로 돌아보고, 내가 일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랫동안 내 나름의 방법들을 하나씩 만들어왔다. 그리고 AI를 일상의 도구로 쓰기 시작하면서 그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이 글은 그 기록이다.
먼저 분명히 해둘 것. 나는 의사가 아니고, 이 글은 진단이나 처방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경험담이다. 비슷한 패턴이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시길 권한다. 다만 나처럼 "왜 나는 이럴까" 싶었던 분에게, 진단명보다 실제로 굴러가는 작업 방식 하나가 작은 위로가 되면 좋겠다.
고요하면 불안한 뇌
나는 내면이 고요해지면 불안하다. 잠을 자는 게 아니라면, 혼자 조용히 있을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 팟캐스트든 음악이든, 뭐라도 틀어놓아야 안심이 된다. 알아보니 이건 ADHD 성향에서 흔히 보고되는 패턴이라고 한다. 산만한 뇌는 자극이 부족한 상태를 못 견뎌서, 조용해지면 머릿속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고, 그걸 가리려 또 다른 자극을 찾는다.
어릴 때 이건 그저 자책의 이유였다. 산만함은 고쳐야 할 결함이라고 배웠으니까. 그런데 살아오며 깨달은 게 있다. 타고난 기질 자체와 싸워 이기기는 어렵다. 대신 그 기질이 "결과"로 드러나는 지점을 바꾸면, 같은 뇌를 가지고도 훨씬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이 주신 이 뇌를 부정하기보다, 그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길을 내는 편이 더 정직하고 지혜로운 청지기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머리 밖으로 꺼내기
내가 제일 먼저 효과를 본 건 아주 단순했다. 지갑을 늘 같은 자리에 두는 것. 예전엔 지갑을 어디 뒀는지 매번 기억으로 쫓아다녔는데, "지갑은 무조건 이 자리"라는 규칙을 세운 뒤로는 잃어버리는 일이 사라졌다.
원리는 두 가지였다. ADHD에서 물건을 자주 잃는 건 의지나 성의의 문제가 아니라 작업기억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억할 일을 환경으로 옮겨버리면, 약한 기억력에 부담을 주는 대신 기억할 필요 자체가 사라진다. 또 하나는 "들어오면 → 여기 둔다"가 무의식적 동작이 되어, 매번 "어디 둘까" 고민하는 결정의 순간을 지워버린 것이다.
이 원리를 할 일 관리로 넓혔다. 해야 하지만 지금 못 하는 일, 혹은 더 중요한 일에 시간을 내기 위해 당장은 미뤄둬야 할 덜 급한 일들은 Workflowy에 적어버리고 그냥 잊는다. 머릿속에 여러 항목을 띄워두는 게 내게는 제일 큰 부담이다. 그래서 일단 적어두면 "이건 시스템이 기억해주니 내가 들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가 와서 마음이 놓인다. 산만한 뇌는 해야 할 일의 항목이 떠다니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시끄러워진다. 앞서 말한 "고요하면 불안하다"와도 이어지는 지점이다.
대신 "지금 뭘 해야 하지?" 싶을 때마다 Workflowy를 열어보는 습관을 만들었다. 막막함이 올라오는 그 순간이 곧 "목록을 연다"는 신호가 되도록 연결해둔 것이다. 적어두고도 그 목록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다는 ADHD의 흔한 함정을, 알람 없이 트리거 하나로 푼 셈이다. 그리고 하나씩 체크해가며 일한다. 끝낸 항목이 정리되니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가 늘 눈에 보이고, 체크하는 순간의 작은 완료감이 다음으로 넘어갈 힘이 된다. ADHD 뇌가 약한 "보상 없이 꾸준히"를, 작은 보상을 잘게 깔아 보완한 셈이다. 그래서 길을 잃지 않는다.
AI를 만나고 강렬해진 변화
진짜 변화는 AI를 일상의 도구로 쓰면서 왔다. 나는 일하다 중간에 끊기면 다시 그 일로 돌아가는 게 정말 힘든 사람이다. 누구나 방해받으면 다시 몰입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ADHD에서는 "내가 뭘 하던 중이었지, 어디까지 했지" 하는 맥락이 통째로 날아가 복귀 비용이 훨씬 크다.
설교를 쓰는 중에 이메일이 오거나 전화를 받으면, 예전엔 다시 설교로 돌아가는 일이 고역이었다. 그런데 AI와 함께 작업하면 대화창에 내가 준비하던 흐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끊긴 맥락을 머리로 재구성할 필요 없이 화면에서 그대로 집어 올린다. 지갑을 같은 자리에 두던 것과 똑같은 원리다. 약한 작업기억을 화면이라는 외부에 맡긴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따로 있다. 나는 산만함과 과몰입이라는 서로 다른 두 약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단조로운 한 가지 일을 못 견디면서도, 한번 빠지면 좀처럼 못 빠져나온다. 그런 내가 여러 대화창을 일부러 점프하며 일하니 이 둘이 서로 상쇄된다. AI가 답을 만드는 1~3분의 대기 시간을 다른 일로 채우니 자극 결핍이 생기지 않고, 동시에 강제로 시선을 옮기게 되니 한 가지에 과몰입해 갇히는 것도 막아준다. 산만함을 약점이 아니라 작업 전환의 연료로 쓰고 있는 셈이다.
처음엔 입력 하나 해놓고 답을 기다리는 그 1분이 너무 괴로웠다. 그 빈 시간에 다른 일이 끼어드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두세 가지를 동시에 펼쳐놓고, 하나에서 다음으로 일부러 점프하며 일한다.
기다림이 쉼표가 되다
여기서 가장 신기했던 건, 그 "기다리는 시간"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혔다는 점이다.
이메일 답장이나 행정 처리 같은, 비교적 독립적인 일들은 이 점프 방식이 확실히 능률을 올려준다. 한 작업이 막히거나 대기 상태일 때 다른 일로 넘어가도 잃을 맥락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에 과몰입했다가 끝나면 녹초가 되어 탈진하는 일도 눈에 띄게 줄었다. 강제로 시선을 옮기니 과몰입이 쌓이기 전에 끊어지는, 자연스러운 페이싱 장치가 생긴 것이다.
예전에 "못 견디던 빈 시간"이 이제는 몰입과 몰입 사이의 회복 구간이 됐다. 같은 1~10분인데 역할이 정반대가 된 것이다.
설교는 '긴 호흡'으로
다만 모든 일을 점프하며 하지는 않는다. 설교처럼 하나의 긴 신학적 흐름을 쌓아 올리는 작업은 결이 다르다. 본문 해석에서 신학적 함의로, 다시 회중을 향한 적용으로 이어지는 사고의 사슬이 한번 끊기면, 그 연결을 다시 잇는 비용이 크다. 그래서 처음엔 "설교는 끊지 말고 길게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내 방식을 들여다보니 조금 달랐다.
설교 작업은 사실 긴 호흡 단위의 사이클이었다. 내가 AI에게 줄 내용 — 본문을 묵상하며 떠오른 것, 풀어내고 싶은 흐름 — 을 길게 정리해 한 번에 쏟아낸다(집중·출력) → 보낸다 →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물을 마시거나 음악을 바꾸거나 짧게 다른 일을 한다 → 응답을 보고 다음 호흡으로 들어간다. 이 한 호흡이 한 세션이 되고, 5분이 되기도 10분이 되기도 한다.
이게 과몰입으로 빠지지 않는 이유는, 한 호흡을 뱉을 때마다 구조적으로 쉼표가 찍히기 때문이다. 끊지 말아야 할 건 한 호흡 안의 출력이지, 호흡과 호흡 사이는 오히려 끊어주는 편이 내게는 낫다. 출력의 강도는 높지만 매 사이클마다 리셋이 되니 탈진이 쌓이지 않는다. 설교의 깊이는 지키면서도, 사람이 무너지지 않는 리듬을 찾은 것이다.
내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면
내 뇌를 컴퓨터 칩으로 비유해보니 내가 왜 그렇게 일하는지가 한층 선명해졌다. (어디까지나 나를 설명하려고 빗댄 비유일 뿐, ADHD 일반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같은 ADHD라도 사람마다 칩의 스펙은 제각각일 것이다.)
먼저 메모리(RAM)가 작다. 한 번에 여러 개를 띄워놓고 작업하기가 버겁다. 그래서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의 목록을 계속 유지하려면 메모리를 너무 많이 차지한다. 그런데 그것을 간단히 Workflowy나 AI 대화창 같은 외부로 돌려두면 내가 스스로 그것을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된다. 다시 그 작업에 도착했을 때, 마치 context 파일을 읽듯 한 번 읽어내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코어 수도 적다. 진짜 의미의 병렬 처리, 두세 가지를 정말 동시에 굴리는 건 안 된다. 그래서 앞에서 "동시에 여러 일을 굴린다"고 한 건 사실 동시 처리가 아니었다. 코어 하나를 이 작업 저 작업으로 빠르게 옮겨 붙이는 것에 가깝다. 코어가 많아 동시에 돌리는 게 아니라, 단일 코어로 이 일을 처리하고 다음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동시에 처리하는 게 아니라, 전환이 빠른 것이다.
그런데 클럭은 높다. 하나에 일단 락이 걸리면 처리가 빠르고 깊게 치고 나간다. 설교 한 편을 한 호흡으로 쏟아낼 때가 딱 이 상태다. 문제는 클럭이 높아서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가속이 붙어 스스로 못 멈춘다. 몇 시간이고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계속 작업한다. 그리고 끝나면 녹초가 된다. 하이퍼포커스의 폭발력이자 위험이다. 예전에는 한 번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멈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끝날 타이밍"은 대개 더는 미룰 수 없는 최종 데드라인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써서 겨우 설교를 하거나 과제를 제출하곤 했다. 청소년기에 갑자기 생겼다고 믿었던 그 "집중력"의 정체가 사실은 통제되지 않던 하이퍼포커스였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안다.
마지막으로 재시동 비용이 크다. 클럭이 높고 연산이 깊게 진행될수록, 누가 방해해 그게 끊기는 순간 날아가는 양도 크고, 그 속도까지 다시 끌어올리는 비용도 크다. RAM도 작으니 끊긴 맥락을 머리로 복원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인터럽트가 들어오면 재시동이 유독 힘들다.
신기한 건, 내가 그동안 만들어온 방법들이 전부 이 칩 스펙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점이다. 작은 RAM은 외부 메모리로 스왑하고, 적은 코어는 동시 처리 대신 빠른 점프로 굴리고, 높은 클럭의 폭주는 호흡 단위로 끊어 식히고, 큰 재시동 비용은 화면에 맥락을 남겨 복원을 싸게 만든다. 칩 자체는 바꿀 수 없으니, 그 칩에 맞는 운영체제를 직접 짠 셈이다.
그래도 무너지는 날 — 크래시와 회복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마치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들리지만, 솔직히 그렇지 않다. 이 점프 방식이 만능은 아니다. 너무 지치거나 머리가 과부하된 날은 "막막할 때 목록을 연다"는 그 트리거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호흡을 끊어 식히는 장치도 하이퍼포커스의 폭주는 잡아주지만, 종일 쌓인 피로까지 막아주지는 못한다.
특히 열심히 일한 날일수록 저녁에 크게 무너진다. 소파나 침대에 늘어져, 아무 생각 없이 쇼츠만 들여다본다. 자극은 계속 들어오는데 내가 뭔가를 출력하지는 않아도 되는, 딱 그런 상태다.
왜 열심히 한 날 더 심할까. 일하는 내내 나는 출력만 한 게 아니라, 산만함을 억누르고 주의를 한 곳에 붙들어두는 자기조절을 동시에 돌리고 있었다. 이 "주의를 의지로 붙드는 일"이 내 칩에서는 굉장히 비싼 백그라운드 프로세스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작업량보다 실제 소모가 훨씬 크다. 그렇게 자원이 바닥난 저녁, 시스템은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한다. 새로 출력할 힘은 없는데(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겠고), 그러면서도 완전한 고요는 여전히 못 견딘다(그래서 자극은 필요하다). 쇼츠가 정확히 그 교집합이다. 자극은 끊임없이 들어와 불안을 막아주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 바닥난 자원으로도 버틸 수 있다.
문제는 쇼츠가 회복이 아니라는 데 있다. 화면이 1~2초마다 바뀌니 뇌는 매번 새 입력을 처리하느라 사실은 계속 일하고 있다. 허기는 달래지만 영양은 없는 음식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한참 보고 나도 개운하지 않고, 시간만 녹고, 다음 날이 더 무겁다.
그러다 알게 됐다. 같은 "멍하니 있기"라도 내 뇌에 진짜 쉼이 되는 것들이 따로 있다는 걸. 불멍, 산책, 가족과의 드라이브, 그리고 노을. 이것들은 쇼츠와 정반대다. 자극이 있긴 한데 단조롭고 천천히 흐른다. 불꽃의 일렁임도, 흘러가는 창밖 풍경도, 시시각각 바뀌는 노을빛도, 시선을 붙잡아둘 만큼의 자극은 되는데 뇌에 새 정보 처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요하면 불안한" 그 저각성 상태로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진짜로 비워진다. 완전한 자극 제로(고요)는 어차피 내게 불안이고, 빠른 자극(쇼츠)은 쉬는 게 아니라 일하는 것이니, 그 사이 어딘가의 "낮고 느린 자극"이 내 뇌의 정속 주행 구간인 셈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노을을 가장 좋아한다. 노을에는 다른 것에 없는 게 있다. 자연스러운 끝이 있다는 것. 쇼츠는 끝이 없고 불멍은 마음먹고 꺼야 끝나지만, 노을은 해가 지면 저절로 닫힌다. 그 자체로 하루를 마감하는 의식이 되어준다. 종일 가까운 화면만 들여다보던 시선이 먼 하늘로 풀리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 앞에 서면 종일 "내가 처리해야 할 것들"로 빽빽하던 머릿속이 나보다 큰 무언가 쪽으로 돌아선다. 목회자로서 그 시간이 단순한 휴식 이상으로 채워지는 시간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러니 이제는 크래시가 온 저녁, 쇼츠로 향하는 손을 가능하면 창밖 노을 쪽으로 한 칸만 틀어보려 한다. 물론 너무 지친 날엔 그냥 쇼츠로 무너지기도 한다. 그걸 매번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바닥난 시스템이 가장 적은 비용으로 버티는 방식일 뿐, 게으름이 아니니까. 다만 "이건 회복이 아니라 버티기"라는 걸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조금 더 충전되는 쪽으로 방향을 틀 여지가 생긴다.
마무리 — 약점이 아니라 청지기직
정리하면 이렇다. 설교처럼 깊게 통합해야 하는 작업은 긴 호흡으로 한 호흡씩, 병렬이 가능한 일상 업무는 의도적으로 점프하며. 그 사이사이 기억은 머리 밖(메모·화면)에 맡기고, 다 쏟아낸 저녁에는 쇼츠가 아니라 노을로 충전한다.
나는 오랜 시간 나 스스로를 관찰하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내가 가진 특성을 안고 살아남기 위해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왔다. 이제는 나를 조금 더 잘 알아가고, 그에 맞는 도구들을 쓰고 있다. ADHD를 "없애는" 게 목표가 아니라, 그 성향에 맞게 환경과 도구를 짜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니 사역의 일상이 훨씬 잘 굴러간다. 타고난 기질은 그대로지만, 그것이 "맡은 일을 끝내지 못함"으로 표출되는 것을 막은 것이다.
AI는 그 과정에서 내게 단지 똑똑한 조수가 아니다. RAM이 작고 단일 코어 클럭만 높은 나를, 밖에서 확장해주는 또 하나의 뇌다. 그리고 그 모든 구조를 짜고 또 짜면서 드는 생각은, 결국 이것도 청지기직이라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이 뇌를 부정하거나 자책하는 대신, 그 작동 방식을 정직하게 이해하고 거기 맞는 길을 내는 일. 하나님이 이렇게 지으신 나를, 가장 나답게 일하도록 돌보는 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