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순종이 어려울까?
"순종하겠습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기도하면서, 이 고백을 수없이 합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면 어떤가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내 자존심이 상할 때, 내가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또 한 번 용서하고 또 한 번 양보해야 할 때, 우리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요?"
왜 맨날 나만 희생해야 하나요? 왜 나만 사과해야 하나요? 왜 나만 마음 써야 하나요? 나는 할 만큼 했어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요?
히브리서 10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드리는 예배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진정한 제사란 무엇입니까?"
그림자와 실체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저자가 얼마나 치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증하는지 감탄하게 됩니다. 1장부터 7장까지 예수님이 천사보다, 모세보다, 아론보다 뛰어나신 분임을 증명하고, 8-9장에서는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며 하늘 성소에서 단번에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더 나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0장에 이르러 저자는 핵심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그 제사의 실체는 무엇인가?"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히 10:1)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실체를 가리키지만, 그림자 자체가 실체는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했습니다(4절). 그래서 그 제사는 반복되어야 했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안식일마다, 절기마다,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마다. 왜 반복해야 했을까요? 그 제사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제사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히 10:9)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 한 문장이 진정한 제사의 실체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이것은 단순히 사울 개인에게 한 책망이 아니라,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진리를 완벽하게 구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계신 예수님께도 "내 원"이 있으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끝까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 앞에 "아니요"라고 대답할 때,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대제사장이었으며, 동시에 제사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단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습니다(10절).
우리의 현실: 알레르기 같은 관계
그런데 우리의 실제 삶은 어떤가요?
매일의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왜 맨날 나만 희생해야 하고, 사과해야 하고, 돈 써야 하고, 마음 써야 하는지.
특히 관계의 문제에서 그렇습니다. 목회를 하며 심방을 다니다 보면 이 문제에 자주 봉착합니다. 용서하고, 용납하고, 포용해야 하는데. "목사님, 언제까지 해야 하나요? 나는 할 만큼 했어요."
재미있는 것은, 어떤 관계는 마치 알레르기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안 생기는데, 나한테만 그 사람이 알레르기 반응처럼 일어납니다. 서로 부딪치지 않고, 피하면 상관없습니다.
그럴 때, 그냥 피하고 안 보면 상책일까요? 어떻게 보면 그게 쉽고 편한 답인 것 같습니다. 자존심도 상하지 않고, 더 이상 손해 보지 않고, 심력을 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그 사람을 사용하여 나의 부족함을 다루십니다.
"그러면 나는요?"
저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억울함에 복받쳐 이렇게 말했던 것만 기억납니다.
"그러면 나는요?"
그런데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늘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죽었습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 계십니다"라고. 그런데 억울함에 복받쳐 외쳤던 그 여섯 글자가 제 심령에 박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 제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죽지 않았느냐? 그러면 나는요? 라고 물을 '나'가 아직도 살아있느냐?"
우리는 "나는 죽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그러면 나는요?"라고 묻는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은혜로만 가능한 순종
"그러면 나는요?"라는 질문의 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포기가 필요합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힘으로 되었으면 예수가 이 땅에 오시지 않았어도 됐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아를 죽이고 순종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은혜로만 됩니다. 정직하게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 제가 제 자아를 불타는 제단 위에 태우고 싶은데요. 그게 잘 안 됩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정직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를, 이 제사를 우리 힘으로 드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보다, 내 자존심보다, 내 손해보다, 주님의 인자하심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러면 나는요?"라는 질문 앞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하십시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 기도를 붙들어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 제가 제 자아를 불타는 제단 위에 태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오늘 만날 그 사람 앞에서, 오늘 부딪칠 그 상황 앞에서, "그러면 나는요?"라는 질문이 터져 나올 때,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피하지 마십시오. 은혜를 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예"라고 대답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 하루 하나님의 뜻에 "예"라고 대답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 최근에 "그러면 나는요?"라는 질문이 터져 나왔던 순간이 있었나요?
- 나에게 "알레르기 같은 관계"가 있나요?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다루시려는 나의 부족함은 무엇일까요?
-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고백이 오늘 나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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